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와타 사토루 (문단 편집) ==== 입사 초기 ====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HAL 연구소]]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졸업 후 정식 입사. 당시부터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의 일화로 당시 후지모토 켄이라는 고교생이 자신이 만든 PC-8001용 사운드 보드와 프로그램을 들고 팔아줄 곳을 찾다가 HAL 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데, 해당 고교생이 몇 주간 힘들게 만든 프로그램을 단 며칠만에 깨끗하게 고쳐쓰고 숨겨둔 커맨드까지 발견하여 '응 지웠어' 라고 해주는 등 이 창창한 고교생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프로그래머는 다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엔지니어에 맞지 않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 [[https://www.dtmstation.com/archives/51664335.html|#]] 이와타는 HAL은 물론이고 닌텐도에 있어서도 구세주같은 존재였는데 당시 [[패미컴]]의 CPU였던 [[모스 테크놀로지 6502]]는 닌텐도는 물론이고 일본 안에서도 도쿄대와 교토대의 몇 명만이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풍문이 돌았을 정도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머가 적었는데[* 당시 일본의 [[8비트]] [[PC]]는 [[Z80]]을 채용한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당장 3대 기기라고 할 수 있는 [[NEC]] [[PC-8801]], [[샤프(기업)|SHARP]] X1, [[후지쯔]] FM77 중에 Z80계 CPU가 아닌 건 FM77 시리즈 뿐이다. 3대 머신만큼이나 잘나갔던 [[MSX]]도 Z80계였고 마이너로 눈을 돌려도 PC고 게임콘솔이고 거의가 다 Z80계 CPU를 채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메이저급 기기 중에 6502계를 채용한 건 패미컴 뿐일 정도. 6502를 채용한 기기들 중 가장 성공한 [[애플 II]]는 일본에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와타가 대학시절 30만엔을 들여 구입했던 기기인 코모도어의 PET2001의 CPU가 6502였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새파란 24세의 청년 이와타는 당시 HAL의 출자회사의 연줄을 이용하여 [[닌텐도]]에 자신을 소개하고 무언가 만들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닌텐도는 흔쾌하게 개발킷을 들려보낸다. 이와타는 그때까지 기술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닌텐도의 기획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며 소프트하우스도 못한다는 패미컴용 골프를 비롯하여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와타가 패미컴용으로 이식한 [[벌룬 파이트]]가 '''아케이드용보다도 더 매끄럽게 움직이자'''[* '''일반적으론 아케이드용이 콘솔용보다 더 매끄러워야 정상이다!''' 아케이드 게임기는 장비 스펙부터 콘솔보다 앞서는데다 레이싱 게임용, 대전 게임용 등 장비를 게임 종류에 따라서 맞춤형으로 제작할 수 있지만, 가정용인 콘솔은 스펙 확장에 한계가 있고 동일한 규격의 장비가 여러 종류의 게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게임들의 콘솔판과 아케이드판 영상을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게임계 3D 열풍의 시작이었던 버추얼 파이터를 예로 들면, 1994년에 출시된 콘솔인 세가 새턴 버전이 1992년에 출시된 Model1 아케이드 버전보다 매우 뒤떨어진다. 사실 이건 새턴이 --개병신같은-- 듀얼 CPU 구조라서 개발이 어려웠던 탓도 있지만..] 오히려 닌텐도에서 배우러 왔을 정도. 당시의 노하우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수중 스테이지에 적용했다고 한다. '''"프로그래머는 'No'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기획서에 적혀 있는 대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최대한 원 기획서에 제시된 것과 가까운 모양으로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게임 제작 과정에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프로그래머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 아이디어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견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해보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구현이 가능하게 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다만 밑에 있는 인터뷰 링크에도 있지만,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아니고 [[니트로 박사|'주어진 시간 안에는 그렇게 만들 수 없다']]는 말은 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 문제로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실 딱 여기가 기획자와 프로그래머 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동안 다른 회사라면 구현하기 힘들다며 반려되던 여러가지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구현시켰다는 듯. 이처럼 완전히 [[코딩덕후]]라 사장직에 올라서 일선에서 멀어졌을 때도 취미삼아 프로그래밍을 하려고 휴일에 혼자 출근했을 정도라고 한다. 단순한 워커홀릭일 뿐만 아니라 작업하는 속도도 남들과 확연히 달랐는데, 한 개발자는 "키보드에서 '탁탁탁'이 아닌 '드르륵' 소리가 나는 것은 처음 보았다"라는 말을 남겼는가 하면, 닌텐도가 주문한 벌룬 파이트를 개발하고 있을 때 방문한 [[요코이 군페이]]가 요청한 수정 사항을 '''그 자리에서''' 다 고쳤다라는 일화도 있다. 이와타는 [[MOTHER 2]]의 메인 프로그래머였는데, 프로그램의 문제로 2년동안 개발되다 중단된 상태에서 그는 프로그래머 겸 프로듀서가 되었다. 당시 [[스파게티 코드]]화 되어 손댈수가 없는 상태가 되자 "지금 이 상태로 계속하면 3년이 추가로 걸리지만, '''처음부터 다시''' 나와 함께 개발을 한다면 '''6개월''' 이내에 완성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진짜로 게임을 싹 밀어버리고 6개월 만에''' 당장 출시가 가능할 정도로 완성을 시켜버렸다.]] 다만 내부에서 추가로 6개월간 좀 더 다듬자는 의견이 나와 총 1년 만에 출시되었다. 이는 MOTHER 2를 개발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여러 대의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파일을 덮어씌우고, 한 명의 리드 프로그래머가 소스 코드를 전부 다 확인하고 관리를 진행했는데, MOTHER 2의 문제점은 프로젝트가 사람이 관리할 수준을 넘어서게 돼서 해당 부분을 담당하는 리드 프로그래머가 폭주한 나머지 [[빤쓰런]]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추가는 고사하고 해당 프로그래머가 맡았던 일마저 꼬일대로 꼬이고 어셈블리어 코딩도 엉망이 되어 접근조차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 것.[* 게임은 완성되었지만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소스 코드]]의 순서가 사람이 관리할 수준이 아니어서 한마디로 심각한 [[커널 패닉]]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게임을 켰는데 정상 작동하지 않고 메인 화면이 깨지면서 초록색 화면만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와타는 아예 게임을 갈아엎고, 우선 연구실간 퀵서비스로 직접 배달되던 데이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터넷 도입, 자연스러운 업무 교류를 위한 [[e메일]] 적용, 작업자 간에 소스 코드가 꼬이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당시에는 미국에서 태동한 신규 개념이었던 [[버전 관리 시스템]]을 적용하고 사무실 인사구조부터 분할 형식으로 바꾸는 등 작업 환경부터 바꾸기 시작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의 버전 관리 시스템에 쓰일 기본 툴의 제작을 명령하고 적용했는데, 후에 다른 게임 회사에서 "버전 관리 시스템 이런 거 어떻게 만들었냐"라고 물어보자 "이와타 씨가 미국에서 배워와서는 갑자기 이렇게 해보자고 들이민건데 시킨대로만 했더니 된거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MOTHER 2에 색다른 장치를 하게 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389/read/1908834|여기를 참조.]] 반면 [[MOTHER 3]]의 프로젝트 중지를 결정한 것 또한 이와타이기도 하며, 프로젝트 재개의 계기를 만든 사람도 이와타이다. 그리고 2006년에 MOTHER 3를 발매할 수 있게 해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